저 역시 역사가 어려운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학창
시절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이른바 시험용 역사였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연도를 외우는 데 급급했지요.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역사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던 시점에,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라고 여겨왔던 역사를 통해 선조들의 삶을
살펴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역사는 제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이전의 왕들은 어느 정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활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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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역시 역사가
어려운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학창 시절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이른바 시험용 역사였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과 연도를 외우는 데 급급했지요.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 역사가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고 있던 시점에, 지루하고 따분한 것이라고
여겨왔던 역사를 통해 선조들의 삶을 살펴보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지금, 역사는 제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프롤로그’ 중에서
이전의 왕들은 어느 정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생활할 수 있었지요. 술을 먹고 싶으면
마시면 되고, 놀고 싶으면 어느 정도 놀 수 있는 여유가 있었어요. 그러나 조선시대 왕들은 이것이 불가능합니다. 정도전이 구상한 경연제도
때문입니다. 경연이란 왕이 신하와 함께 학문을 토론하고 현실 정치를 의논하는 것인데, 사실상 왕을 공부시키는 것입니다. 조강(朝講)이라 하여
아침에 공부하였고, 점심시간에는 주강(晝講)을, 저녁시간엔 석강(夕講)을 했습니다. 이렇게 의무적으로 2시간씩 하루에 총 6시간을 신하들과
공부를 한 겁니다.
그리고 ‘윤대(輪對)’라 하여 의무적으로 각 관청의 관리들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고, 아래로는 선비부터
위로는 재상까지 그들의 상소문을 받아서 읽어야 하는데, 이 상소문을 읽는 시간을 하필 잠자기 직전으로 배치합니다. 상소문에는 비판적인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상소문을 읽는다는 것은 오늘날로 따지면 인터넷에 달린 악플(악성댓글)을 읽는 것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자신이 쓴 글에 달린 악플을 줄줄이 읽으면 잠이 잘 올까요? 정말 죽을 맛이겠지요. 이처럼 조선시대 왕들을 쥐 잡듯이 잡아서 성군으로 만들겠다는
게 바로 정도전의 전략이라고 볼 수 있답니다.
-‘제1대 태조’ 중에서
황희는 ‘노쇠하고 질병이 있다’는 이유로 끈질기게
사직을 요청합니다. 하지만 세종 역시 줄기차게 이를 거절하지요. 결국 세종의 재임기간이 32년인데, 황희는 그중 18년을 영의정으로 재직하며
울며 겨자 먹기로 일을 합니다. 황희가 힘들어할 때마다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며 그를 어르고 달랩니다.
“경의 나이가 아직 극쇠에
미치지 않았고, 병 또한 깊은 데 이르지 않은즉, 기력이 오히려 강건하여 국정을 잡을 만하고, 만일 질병이 생겼다면 마땅히 의약의 치료를 가해야
할 것이요, 설사 상투적인 허식(虛飾)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찌 상규(常規)에 구애로 직임을 사퇴하리오.”
『세종실록』 56권,
14년(1432) 4월 20일
몸이 여기저기 쑤시고 고장나서 은퇴하겠다는 68세의 노인에게 ‘아직 죽을 만큼 쇠약하지 않고 병
또한 깊지 않으며 만일 큰 질병이 발견된다면 치료를 하면 되지 않겠냐’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정말 환장할 노릇이지요.
-‘제4대
세종’ 중에서
연산군 11년(1505) 6월, 연산군은 전국 팔도의 미녀와 튼튼한 말을 구하는 지방 관리인 ‘채홍준사’를
파견하지요.
또한 천 명의 기생들을 둡니다. 그중에 재주만 뛰어나면 ‘운평’이라 하였고, 재주뿐만 아니라 미모가 아름다운 기생은
‘흥청’이라 불렀어요. 이들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세조가 세운 원각사(현 탑골공원)에 수용되지요. 연산군은 수많은 기생들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궁궐에서 함께 놀이를 즐
깁니다.
이러한 놀이 때문에 국고는 텅텅 비게 되고, 나라가 망할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여기서 바로
‘흥청망청’이라는 말이 유래한 거지요.
-‘제10대 연산군’ 중에서
왜군이 한양으로 쭉쭉 침입해오고 있는 가운데,
한양에서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합니다. 임금이 궁궐을 버리고 도망을 간 거지요. 선조는 자신의 몸을 보전하기 위해 한양을 떠나 개성으로,
평양으로, 의주로 옮기며 점점 북쪽으로 몸을 피신하였습니다.
이러한 선조의 행동은 일본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일본은 작은
성의 성주일지라도 전쟁에서 질 위협에 처하면 할복하거나 항복하지, 절대 자기 성을 버리고 도망가지 않거든요.
왕이 도망갔다는 사실에
왜군뿐만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 또한 분노했습니다. 한 나라의 어버이가 자식인 백성을 버리고 자기만 살려고 도망을 치다니! 백성들의 분노는
경복궁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경복궁의 노비 문서들을 불태우면서 궁궐도 함께 활활 불태웠습니다.
-‘제14대 선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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